⎯ 김수정 개인전 《Multi-Channel》 서문
옅은 감각을 붙잡으려 할 때, 의식은 한낮에 꾸는 꿈처럼 아득한 곳을 향한다. 현재는 밖으로 범람하는 내면에 잠겨 점차 어둑해진다. 어둠 속에서 사위를 채우는 것은 다만 흐릿한 잔상 뿐이다. 나와 나의 외부를 결속하던 고리는 느슨해지고, 불현듯 떠오른 이미지들이 틈마다 배어든다. 이것은 한낮에 꾸는 꿈이다. 깨어 있으면서도 꾸는 꿈은 소여된 의식 안에서 흩어진 이미지들의 성좌를 따라간다. 김수정이 그림으로 하여금 채집하고 목격하는 것은 백일몽(白日夢)을 통해 닿을 수 있는 유실된 감각이다. 어른거리는 정서의 잔여는 잇따라 교차하는 주의와 몽상,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수면 위로 솟는다. 순간의 편린은 오로지 그 흐름 내에서, 부단히 서로를 밀고 당기는 가역적인 움직임을 경유하여 이곳에 현전한다. 김수정은 현실과 유리된 몽상, 불안을 야기하는 망각 모두 결핍이 아닌 생성의 조건으로 끌어 안는다. 《Multi-Channel》은 이 “일시적인 백일몽이 한없이 지속”되는 곳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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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능동적인 선택과 배열을 통해 안으로 침투해오는 바깥의 자극에 초점을 맞춘다. 감각의 시야로 들어온 정보와 그 중심이 되는 내적인 초점(Blickpunkt)은 각각 물리적 망막과 심적 망막에 맺힌다.4 그러나 이 초점은 결코 정태적이지 않다. 초점에 기울어진 주의는 금세 중심에서 이탈하여 해소되지 못한 주변의 감각으로 흘러든다. 김수정에게 이와 같은 주의의 역동은 일상의 숱한 변수를 통과하며 이루어지는데, 그 심층에는 주의력결핍장애(ADHD)의 특수한 감각 패턴이 자리한다. 작가는 빠르게 겹쳐지는 자극과 오래 머물지 못하는 인상,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새롭게 떠오르는 감각을 파편적인 텍스트와 이미지로 도출해낸다. 이 일련의 과정은 데이터 시스템의 내부 기억 장치가 여러 신호를 동시에 수신 받는 ‘멀티 채널’과 같은 매커니즘으로 작동한다. 다채널의 감각이 커다란 파도처럼 수차례 밀려들기를 반복하고 나면, 꿈을 꾸고 난 아침처럼 희미한 잔상만이 남는다.5 김수정은 이와 같은 주의의 동역학을 거쳐 끊임없이 이동하는 초점, 그 흔적으로 새겨진 잔상을 회화로 기록한다.
한편 논리적인 서술을 지양하는 작업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내적인 과정, 그림을 전시장에 배치하는 물리적인 과정 모두에서 약한 연결에 의지한다. 이들 사이에 매듭을 짓는 것은 와해된 주의이다. 먼저 물리적, 심적 망막을 지나 종이 위에 맺힌 상은 특정한 도상으로 치환된다. 화면에 혼재하는 이질적인 도상은 고정되지 않는 의식의 결을 쫓아 연속적으로 파생되는 경로를 거친다. 이때 외부의 정보로 유입된 결과물은 또 다른 이미지를 촉발하는 기제가 된다. 이를테면 포스펜(Phosphene) 현상 을 통해 보게 된 녹색 원으로부터 신경에서 형성된 기억을 떠올리고, 그로부터 다시 영화 〈녹색 광선(Le Rayon Vert)〉(1990)의 일몰 장면을 연상하는 식이다.6 처음 착안했던 이미지는 의식의 끝에 이르러 전혀 다른 무언가로 현현한다. 하지만 선행된 것과 나중에 더해진 것 간의 격차는 하나의 평면 안에서 좁혀진다. 조각난 이미지들의 행간은 지속되는 미증유의 감각 아래 구조화되고, 주의와 몽상은 도식적으로 이분되지 않은 채 서로에게 침투하며 다중의 지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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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이 세계를 인식하고 기록하는 방식은 주의력 결핍이라는 병리적인 현상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나, 이는 사실 주의 자체의 보편적인 속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불확실한 변수에 의해 강화되거나 약화되고, 떠오르거나 가라앉고, 사그라들거나 밀려드는 주의의 역동은 주의 집중과 분산이 하나의 단일한 연속체로 사유될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7 몽유와 몰입, 망각과 기억은 상호를 전제로 저편의 가능성을 비춘다. 김수정이 일상과 작업에서 잃거나 얻게 되는 것들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서로를 돕는다. 산재된 감각의 조각들은 위태로울지라도 매번 다르게 그려낼 수 있는 별자리처럼 새로운 조우의 잠재성을 지닌다. 《Multi-Channel》은 그렇게 그려진 별자리 중 하나이다. 여기 놓인 무수한 이미지들은 온갖 다른 상태의 빛과 어둠을 가로질러, 쉼없이 오고 가는 파도를 통해 이제 막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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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i-Channel》
김수정 개인전
2025. 8. 25 - 9. 7
방도
(서울시 영등포구 영중로24길 33-1 2-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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