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선필 개인전 《음울한 귤》
깊이의 결핍(poor depth perception)
평평한 땅을 헛디뎌 넘어지는 일, 애써 길들인 물건을 연거푸 떨어뜨리는 일. 피할 수 있었던 모서리에 빈번히 부딪혀 멍드는 일, 느닷없는 현기증과 두통에 시달리는 일. 소소한 불운과 부주의, 그리고 이 모든 삐걱거림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는 일.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도무지 해결되지 않던 문제의 원인은 부등시(不等視)에 있었다. 부등시, 달리 말해 짝눈은 글자 그대로 두 눈의 시력 차이가 큰 상태를 의미한다. 그중에서도 근시안과 원시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비운의 처지는 특별히 ‘이종 부등시’라고 불린다. 나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사정을 자각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두 망막에 맺히는 상의 굴절 정도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달하자, 뇌는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마지막 판단을 내렸다. 오로지 ‘보기’ 위해, 한쪽 눈의 정보만을 취하고 반대쪽 눈이 수용하는 정보는 점차 억제해 갔다. 그 까닭으로 나는 비교적 시력이 좋은 오른쪽 눈에 의지해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망각의 전략은 예견된 실패로 돌아갔다. 양안의 시차가 사라지면서 깊이와 거리를 판단하는 능력 역시 함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발생한 ‘깊이의 결핍’은 여하한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쪽 눈의 결여로 벌어진 일련의 소란 속에서, 불현듯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그 놀라움이란 – 내가 긴 시간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얼마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새삼 ‘무엇을’ 보는지보다 ‘어떻게’ 보는지를 의식하게 해주었다. 한쪽 눈으로만 보는 납작한 세계는 넘어지는 일을 되풀이하더라도 어지러움으로 하여금 현실과의 거리를 거듭 새롭게 헤아리도록 했다. 도리어 어떤 종류의 무능함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했다. 불완전한 시야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진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에, 잇따르는 실패에도 반대편에 자리 잡은 동형의 무모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주어진 것은 조용히 찾아오는 정동에 초점을 맞추는 눈이었다.
리얼리티와 망각의 역설
‘무엇을 만들지’보다 ‘어떻게 만들지’에 골몰하는 태도는 으레 눈길을 끌었다. 시선을 옮기자마자 알아챌 수 있는 ‘무엇’보다는 시간을 들여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어떻게’를 좇는 일에 마음이 더 기울었다.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막연한 도정에 합류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심코 거리를 좁히는 습관은 삼가야 했다. 애정하는 마음과 덮어놓고 알음하는 선의는 고작 몇 걸음의 차이라, 늘 주의해야 하는 법이다.
나름 곤두선 눈초리로 바라본 돈선필의 글과 작업에서 가장 완연하게 드러난 것은 거리 두기의 능숙함이었다. 분명 “어눌하고 오래 생각해야 하는 순간”들을 쌓아 왔음에도, 그는 자신이 본 것과 아는 것의 관성에 쉽사리 휩쓸리지 않는 듯했다.1 수집하고 참조해 온 대상을 향한 애틋한 감정,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꼿꼿한 자세가 불가능한 종합 사이에서 적절한 간극을 둔 채 병존하는 셈이다. 어떤 눈을 가지면 꽤나 긴 기간 동안 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건지, 성급하게 묻기 전에 그가 만들고 쓴 것들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빼곡한 사물과 글자들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 않는 초연한 태도가 있었다. 반면 예상으로부터 멀찍이 빗겨 나간 곳에는 참된 ‘가짜’를 통해 현실에 복무하는 마음, 그로 인해 갖게 된 외양으로부터 도약해오는 마음이 있었다.
괄목할 지점은 그가 언어와 사물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아는 것에 무뎌지지 않기, 올바르게 잊기. 이는 이름도 생소한 ‘특촬’이라는 장르의 구조와 궤를 같이한다. 특촬의 어설픈 재현에 드리워진 일그러짐, 낡고 바랜 시간의 흔적은 정제된 이미지의 폭력성으로 가득한 시각장에 또렷한 이물감을 일으킨다. 진부할지라도 끊임없이 ‘낯설게 보기’를 소구하는 특촬은 의도된 재현의 실패 속에서 물성을 경유한 정동의 가치를 드러낸다. 리얼리티가 필연적인 진보나 목적지향적인 과정이 아닌, 예측 불가능한 사건과 제약 – 역사적 우연성(historical contingency) – 을 동력 삼아 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전에 없던 감응을 불러왔다.2 특촬은 재현의 기술이 단선적이고 점진적으로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는 관점에 균열을 가한다.
돈선필이 특촬에서 길어 올린 리얼리티의 방법론은 작업에 임하는 그의 태도 전반에 스며 있다. 먼저 그는 응시하는 대상에 대한 익숙함, 즉 대상에 대한 온갖 경험과 지식에 괄호를 쳐 둔다. 빌렘 플루서에 따르면, ‘괄호 치기’의 규율은 아는 것을 잊는 데에 있다. 주지하듯 “잊기보다는 배우기가 더 수월하기 때문”에, 망각의 규율에 따르려는 시도는 곧잘 실패로 이어진다.3 그렇지만 의도적인 망각에 번번이 실패하는 자의 무능력함은 새로운 본질을 비추는 발견의 계기가 된다. 이를테면 돈선필은 특촬 슈트가 ‘재현 도구’로서 지닌 역할과 그 사회적 함의를 잘 알면서도, 앎을 망각하려는 시도에서 잊혀진 정동적 가치를 놀라운 사실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가 발견한 “오랜 것에서의 새로운 것”은 기존의 의미망에서 벗어나 특촬을 바라보려는 시도와 그러한 접근의 불가피한 실패를 인정하는 태도 사이에 자리한다.4 특촬의 사물성, 사물의 쓰임과 목적을 가뿐히 초과하는 뒤늦은 발견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망각을 지나 “빛 아래로” 나오게 되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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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와 거리, 특촬과 사물, 태도와 깊이 따위에 괄호를 쳐 가며 재차 기억하게 된 것은 미술이라는 연약한 다짐이었다. 흔들리는 이곳에서 초점을 맞추는 일은 언제나 절박하다.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괄호 안의 것들을 바라볼 수 없고, 그려낼 수 없고, 호명할 수 없다. 그것은 근시와 원시, 행운과 불운 가운데에서도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쓰는 일이다. “결국 초점을 맞추는 데 실패하더라도 슬퍼하지 않는 일이다. 초점이 맞는 순간, 초점이 맞기 때문에 또 버려지는 진실들을 생각하는 일이다.”6 그리고 이 모든 무용한 과정을 무한반복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가항력적인 결함에 의해 개방되는 가능성은 예사로운 날들로부터 쉽게 탈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 목격한 사물과 이미지와 말과 글을 전부 잊고, 무구한 눈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다만 잊는 것이 잃는 것은 아님을 영영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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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한 귤》
돈선필 개인전
2025. 5. 30 - 7. 26
페리지갤러리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18 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