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없는 이미지
⎯  임세현 개인전 《임시납작구역》 서문

                     장소는 특수한 과거와 유일한 미래의 원천이다. 좌표로 점 찍어진 추상적인 공간(space)과 달리, 인간의 삶과 밀착된 장소(place)는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피워내는 하나의 ‘환경’으로서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나 주지하듯, 장소가 지닌 인류학적 가치는 본래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빠른 속도로 획일화된 경관, 자본의 질서 아래 가려진 경험은 개개인의 정체성과 그 총합으로 이루어진 역사성을 상실해갔다. 지난 세기 사람과 장소의 관계에 천착한 많은 학자들의 결론은 이러한 ‘무장소성(placelessness)’, 즉 장소의 상실, ‘장소 없음’으로 귀결되었다. 그럼에도 동시대의 복합적인 조건 – 디지털 미디어, 탈영토화된 사회, 기후위기 – 속에서 장소를 향한 인간의 애착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이는 장소 없는 장소, ‘비장소(non-place)’의 모습으로 여전히 삶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을 테다.  임세현의 개인전 《임시납작구역》은 이방인의 위치에서 장소를 기록한 디지털 이미지의 유랑을 통해 비장소의 임시성을 구현한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이미지, 일시적인 정주만을 반복하는 이미지는 한정된 기간 동안 이곳을 찾아올 익명의 정체성과 낯선 곳에서의 배회를 기꺼이 수긍한다.

                   8개월 간 스위스에 체류하며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본 이국의 풍경은 ‘이곳에 있다’는 감각과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감각 사이에서 납작한 평면으로 절취되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짧은 순간에만 허락되는 일시적인 관계는 미약한 기억의 단서로 남지만, 부러 꺼내어보지 않는 이상 현실의 일부로 기능하지 못한다. 임세현은 디지털 툴을 활용해 데이터로 현전하는 이미지를 실재하는 장소로부터 재차 굴절시킨다. 이를테면 그는 블렌더 프로그램에서 사실적인 재현을 위해 활용되는 광선 추적 기법(Ray Tracing)의 방식을 전복한다. 반투명한 이미지가 여러 장 중첩된 부분만을 또렷하게 인식하도록 설정된 렌더링 카메라는 단일 이미지를 텅 빈 공간(checkerboard pattern)으로 그려낸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은 잠재된 데이터에서 가시적인 이미지로, 왜곡된 3D 그래픽으로, 다시금 전시장 모서리에 투사된 납작한 영상으로 그 지지체를 옮겨간다.

                   다음으로 데이터이자, 사진이자, 3D 그래픽이자, 10분 남짓한 길이의 영상이었던 이미지는 PVC 표면 위에 전사됨으로써 물리적인 장소를 일부분 점유하기에 이른다. 가변적인 구조물 위에 이리저리 뒤틀리고 접힌 형태로 안착되어 있는 이 출력물은 설치되는 방식조차 전시장 내부의 구조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이렇듯 본래의 장소를 보존하지 못하고 탈장소화(de-territorialization)를 거듭하는 임세현의 이미지는 ‘어디서 찍혔는가’보다 ‘지금 어디에, 어떤 형태로 떠돌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존재가 된다. 인과에 따른 흐름이 아닌 독립적인 순간들의 우연한 맞물림을 통해 사라지고 드러나기를 지속하며, 독립적으로 자생하거나 온전히 정박하지 못한 채 장소 없는 ‘상태’를 되풀이한다. 그 자체로 하나의 거처 없는 유랑자이자 임시적인 시공간을 발생시키는 비장소가 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미지가 잠시 머무는 모든 표면 또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지 못한다. 단지 의미를 통과시키는 장치로 존재하는 이들은 새롭게 세워지고 해체되며 이미지 자체보다 더 짧은 수명을 갖게 된다.

                    ‘임시성’을 자처하며, 임세현의 작업은 비장소의 개념을 단순히 인용하거나 묘사하지 않고 하나의 형식적 전략으로 수행해 나간다. 여러 각도로 왜곡되어 투사된 영상과 조각 조각 흩뿌려진 PVC 필름은 이미지가 장소를 소유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탈장소화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복수의 지지체를 경유하여 변형과 순환, 조립과 해체를 거친 이미지는 전시장이라는 ‘임시 구역’ 안에서 혼재된 풍경을 일군다. 중요한 것은 전시장 역시 작품을 완전히 고정시키는 장소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관객의 동선과 시선에 따라 다른 레이어로 비춰지는 전시장 또한 비장소의 구조를 공간의 규모로 증폭시킨다. 여기서 관객은 카메라 뷰포트를 통해 생경한 풍경과 맞닿았던 작가처럼 이방인의 시선으로 전시장 풍경을 대면한다. 낯선 작업과 전시장을 눈으로 보고, 몇 장의 사진을 찍어 휴대폰 앨범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가 언젠가 다시 꺼내 보기도 하며, 혹은 영원히 잊으며, 관람의 행위는 작업의 과정 위에 비슷한 발자국을 따라 갈 것이다. 여러 시선들 속에 이미지는 잠시 거쳐갈 뿐이지만, 그 이행을 통해 또 다른 생의 가능성을 남긴다.

                    여행자로 맞닥뜨린 낯선 곳, 낯선 곳으로부터 이주해온 이미지와 이미지가 거쳐간 모든 매체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유예하며 머무는 기착지(stopover)와 같다. 그러나 이 모든 비장소는 결핍이나 상실의 부정성에 그치지 않고 영속적인 임시성을 통해 이미지가 생을 이어 나가는 또 다른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임세현의 ‘임시납작구역’은 이처럼 영구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비장소의 수행을 통해 다시 떠오르고, 겹쳐지고, 이내 사라지는 이미지의 생을 연장한다.


1.본 글에서 언급하는 ‘비장소’는 마르크 오제(Marc Augé)가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Non-Places: An Introduction to Supermodernity)』(1992)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 관계, 역사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임시성과 익명성의 공간을 의미한다.  
2. 디지털 이미지를 편집하는 편집 툴은 ‘체커보드 패턴(checkerboard pattern)을 통해 텅 빈 공간, 즉 이미지가 없는 투명한 영역을 시각적으로 구분한다. 임세현의 영상에서 중첩되지 못한 단일한 이미지는 흰색과 회색의 체커보드 패턴으로 가시화되어 등장한다.  

 


《임시납작구역》
임세현 개인전

2025. 6. 21 -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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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서대문구 거북골로37-10 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