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서연 진지현 2인전 《그림자 통로》서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지. 지도에 밤을 그려 넣기 위해 까만 연필만 사 모으는 사람이 있고
밤마다 말갛게 차오르는 슬픔을 보여주기 위해 지우개만 사 모으는 사람이 있다.
지도는 찢어지고
(…)
언제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눈앞에 있는 길을 믿을 수 없어 지도를 펼치고는
지도에 없는 것들만 찾는,
사람들로부터.1
影
‘그림자’를 뜻하고 ‘영’이라 읽는 ‘影’는 ‘볕 경(景)’ 자에 ‘터럭 삼(彡)’ 자를 더해 만들어졌다. 빛이 드리운 무늬로서 ‘影’은 그림자가 맺는 빛과의 관계를 함의한다. 빛으로부터, 빛에 의해 어린 그림자는 다만 완전한 어둠에 길항할 뿐이다. ‘그림자 통로’라 이름 붙여진 이곳 역시 ‘그림자 영’의 모양새를 닮아 있다. 김서연과 진지현은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빛이 오는 곳을 가리킨다. 최초의 회화가 벽 위에 투영된 그림자에서 시작되었음을 상기할 때, 살펴야 할 것은 그림을 통해 이양된 빛이다. 이들의 회화는 그림자를 한껏 끌어 안는 방식으로 삶에 깃든 빛을 새긴다. 《그림자 통로》는 빛, 곧 삶의 태도와 다름 없는 “동일한 것의 타자”로서 김서연과 진지현의 그림자-그림을 비춘다.2
거리
그림자의 크기와 짙음은 사물을 비추는 빛과의 거리에 따라 정도를 달리한다. 관건은 거리다. 우리가 맞닥뜨린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대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삶의 불행은 종종 피할 수 없이 ‘주어지는 것’으로서 한순간 가까이 닥쳐온다. 주어진 거리감을 상쇄하고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는 여러 겹의 막을 거쳐 비로소 이루어진다. 김서연은 붓질을 쌓고 닦아내는 과정, 빚어낸 형상을 재차 뭉개는 과정을 통해 성급한 판단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너무 또렷한 것은 때로 너무 흐릿한 것과 다름없기에, 그는 덜어내며 더하는 법을 택해 왔다. 긁힌 표면과 점토로 응집된 덩어리는 서로의 “반사광”으로 호응하고, 형상의 결속과 와해는 희미한 서사를 엮어낸다.3 비워진 행간마다 자리하는 것은 위태로운 믿음과 견고한 무너짐의 사건이다. 그 가운데에도 속속들이 들어선 희망은 매일 찾아오는 “가벼운 절망”을 비석처럼 세워 둔 채 말간 슬픔을 기념한다.4 김서연의 그림에서, 희망과 절망은 등을 맞대고 대립하기보다 버티어 마주본다. 마냥 밝지 않은 희망을 매만지는 일, 그로부터 쓰여진 이야기는 철저한 절망에도 초연해질 마음의 무르기를 다져준다.
시선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두 발 딛고 설 땅을 향한 염원이 담겨 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달까지 갈 수 없을지라도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 있을 테다.5 희망을 말하기 버거울 정도로 무력한 하루 끝에 생을 오로지 견디는 법. 진지현의 눈은 달을 향해 걸어가는 마음으로 희망을 찾는다. 메마른 먹선의 틈으로 새어나오는 것은 소거되고 남겨진 여백이 아닌 구태여 지켜낸 빛에 가깝다. 질박한 갈필을 통해 어둠을 손질하는 과정은 매일의 삶에 깃드는 고단함과 꼭 같아서, 꽉 막혀 뚫리지 않던 현실을 어느 순간 돌파하게 해준다. 어둠으로 빚어진 빛의 풍경이 씨실과 날실로 직조된 세상의 그물처럼 비춰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기입된 선들은 희미한 과거의 빛이 거처할 어둠을 마련해 두고, 미래로 던져진 절실함은 도착한 오늘을 하얗게 밝힌다. 이곳을 수놓는 새, 구름, 달과 별, 꽃과 같은 표상은 먼 하늘과 땅 사이에 함께 놓인 유약한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무망함으로 돌아서지 않는, 삶을 돕는 그림은 뒤덮일 어둠을 몰아내고 이내 빛을 품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 통로
전시장에는 허공에 기대어 세워진 그림자 통로가 있다. 마주본 김서연과 진지현의 그림은 “어두워진 빛과 밝혀진 어둠”만이 차이의 계기를 가져다 준다는 희망을 어렴풋이 내비친다.6 통로 너머에는 분명 또 다른 그림자들이 늘어서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거리를 두고, 시선을 옮기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 언제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
《그림자 통로: Shadow‘s Passage》
김서연 진지현
2025. 9. 16 - 9. 28
예술 공간 [:틈]
(마포구 월드컵로 31길 6, 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