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
⎯  오지은 평론


                   말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마음, 쓰기 전에는 읽을 수 없는 감정이 있다. 미약한 웅얼거림 속에서 내내 망설이다 뱉은 말이 나를 비출 때, 손에 쥔 몇 개의 단어들 중 가장 알맞다고 여긴 낱말들이 모여 문장을 이룰 때, 마음은 스스로를 자각한다. 간신히 받아 적은 마음은 언어를 통해 머리에 각인된 기억으로 남지만, 어떤 마음은 꿈에서 조차 희미한 모습으로 흩어져 버린다. 공연히 무상함을 느끼는 순간은 일말의 마음이 의식의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때에는 그조차 알아차리기 어렵겠지만, 어떻게든 모르는 것을 궁구하는 누군가는 순간의 예감을 놓치지 않는다. 오지은은 ‘그리기’를 통해 기억의 끄트머리를 쫓아 떠나온, 떠나간 풍경에서 종래의 마음을 반추해 왔다. 한 폭의 풍경이야말로 덧없는 생에 가까운 상(像)이라면, 오지은이 풍경을 그리며 보는 것은 바깥에 놓인 장면이 아닌 안쪽에 속한 자신의 내면일 테다. 우리가 소리 내어 말하며 나의 언어를 듣듯이, 작가는 그리며 스스로의 마음을 본다.

                   오지은의 그림에 대해 말하려면, 오지은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갖는 의미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풍경을 보는 일은 언제나 그리는 일보다 앞서 행해진다. 즉 ‘그리기’는 ‘보기’가 선행된 뒤에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본 것을 그린다’라는 간단한 명제는 오독을 야기할 수 있다. 본 것–풍경이 동작의 대상이 되는 목적어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문장의 구조상, 우리는 작가가 대상으로서의 풍경을 그림의 영역으로 수렴시키고 환원시킨다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오지은의 그림에서, 풍경은 다만 작가가 개방되는 곳이다.1  작가는 풍경을 채집하듯 그림에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풍경에 자신을 개방시킴으로써 비로소 그린다. 속절없이 져버릴 것들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누설한다. 이를테면 지난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은 연인과의 이별 후 매일 달리던 한여름의 하천 곳곳으로 새어 나갔다(〈슬픔에 대처하는 자세〉, 〈분명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2022). 축축하고 더운 공기, 달리기를 하며 새겼던 가쁜 호흡, 갈 곳을 잃어 방황하다가도 이내 풀숲 사이로 흘러드는 마음. 무해한 정원과도 같은 풍경 안에서 작가는 더 이상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에 ‘그리기’란 무엇도 고립되지 않은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이다. 그곳에서 오지은은 이 행위가 약속하는 무엇이 아니라 행위의 속성 자체를 통해 세계와 조응한다.2

1.이장욱, 『영혼의 물질적인 밤』, 문학과지성사, 2023, p.44. 
2. 여기서 ‘조응’이란 “서로에게 열려 있으며, 나뉘지 않는 단일한 생성의 세계에 함께 참여”하는 일을 의미한다. 세계와 조응할 때, 오지은의 그림은 “그저 존재하는(being) 상태가 아니라 생성 중인(becoming) 상태”의 풍경이 된다. 팀 잉골드, 『조응』, 가망서사, 2021, p.31.

                   오지은의 ‘그리기’가 멀거나 가까운 것, 단단하거나 무른 것 사이의 경계 없이 서로를 향해 뻗어 나가려는 몸짓을 닮았다면, 그렇게 해서 그려진 그림은 유기적인 ‘상태’를 표방한다. 고정된 구조 안에서 일정하게 갖춰진 ‘형태’가 아닌, 일시적인 상황으로서의 상태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일부를 닮았다가, 다시 조각난 색과 선으로 흐트러지고 마는 상태들은 캔버스 앞에서의 머뭇거림 마저 한껏 껴안는다. 매끈하고 거침없는 붓질 사이로 망설이듯 그어진 붓질 또한 선택에 의한 것임을 기억할 때, 풍경은 보다 유연해진다. 괴로워하며 주저하던 시간과 위로 받으며 나아갔던 시간 모두 하나의 풍경으로 중첩된다(〈노을이 지는 오디나무〉, 2023).  

                   오지은이 머물렀던 전주와 이탈리아 돌로미티(Dolomites)의 풍경 또한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화면 안에 뒤섞여 있다(〈바람이 머무는 곳에〉, 2024). 지난 풍경이 머금은 무상함은 화면에 가득 찬 정념으로, 저마다의 정념을 담은 색으로 아로새겨진다. 무상함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에, 빠르고 느리게 요동치는 붓질, 빨갛게 물든 하늘과 초록이 울창한 정경은 다가올 작별에 대비한다. 헤어지며 나눌 인사말을 고르듯, 작가는 마음에 알맞은 색을 고른 뒤 붓을 움직인다. 멀고 먼 두 풍경을 이은 그림은 곧잘 까마득한 과거의 화가와 오늘의 오지은을 겹쳐보게도 한다. 20세기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역시 연인과 함께 갔던 돌로미티의 풍경을 그렸다(Tre Croci-Dolomite Landscape, 1913). 그는 “아침마다 깊은 숲을 지나 짙은 녹색의 지점을 찾아다녔고”, “외로움을 극도로 두려워” 했음에도 “홀로 남아 이 그림을 완성”했다.3 짐작건대 풍경을 그리는 코코슈카의 태도는 오지은의 그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타율적인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마주한 풍경에 기꺼이 마음을 노정하는 두 화가는 그림을 경유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기억 속 정경을 그리는 오지은에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작가는 “매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밀도 있게 몰입하는 현재가 곧 미래”라고 답한다.4 달리 말해 현재에 충실할 때 미래는 자연스럽게 열린다. 작가는 현재에 몰두하는 자신을 “털이 촘촘한 짐승”에 비유한다. 온몸을 빼곡히 덮은 솜털 때문에 조금만 습기가 차도 금세 축축해지고,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예민한 짐승. 이런 종류의 예민함은 작업에서 ‘정확성’이 아닌 ‘정밀성’과 결부된다. 여기서 정밀성이란 회화적 재현에 있어서의 치밀함이 아닌 주의 깊은 관찰과 반응을 통한 헤아림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춤추며 자신의 움직임을 상대에게 맞추는 무용수들이 서로를 관찰하는 행위는 정확하기보다는 정밀하다.5  오지은 또한 풍경과 캔버스의 화면비, 물감의 농도와 색채, 붓질의 리듬 사이에 놓인 관계를 헤아리며 그에 맞춰 움직인다. 사회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말을 빌려, “살아 있는 방식”을 따르는 그리기, “살아있음을 사랑하는” 그림이다.6  이 그림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림에 개방된 우리의 마음이다.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마음, 형언할 수 없었던 감정은 마주한 그림-풍경 앞에서 가까스로 세계와 연결된다.

3.
오스카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시인,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 인용된 구절은 코코슈카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작곡가 알마 말러(Alma Mahler-Werfel)의 회고록에서 가져왔다. “In the mornings we went far into the woods, looking for the greenest spots, (…) despite his panicky fear of solitude, he stayed alone, to turn out drawings of incomparable beauty.” Alma Mahler-Werfel, And the Bridge is Love, New York: Harcourt, Brace & Company, 1958, p.79.

4.
2025년 7월 16일 작가와의 대화.

5.
잉골드, 앞의 책, p.40-4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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