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음 개인전 《하얗게 언 살갗 위로》 review
《하얗게 언 살갗 위로》 전시 전경 | 사진 양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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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른 끝에 남은 것은 빈 곳을 향한 무지였다. 속속들이 알지 못해 웅얼거리는 마음은 부풀어 오르다가도 그만 가라앉았다. 목소리를 빼앗겨 사나운 꿈처럼, 말할 수 없는 긴긴 날들이 이어졌다. 번민하던 시간은 빈자리에 쌓여 금세 허물어질 모래성이 되었다. 파도는 매번 다른 속도와 모양으로 연약한 모래 더미를 무너뜨렸고, 나는 다만 물살에 쓸려 무덤인지 성인지 모를 잔해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따금 들려오는 파열음에 또 한 번의 부서짐을 예감하기도 했다. 불가해한 상실은 가물거리며 부딪는 소리를 잔향으로 남긴 채 그에 앞서 울려오는 서곡을 가늠케 해주었다. 마음의 구멍을 채울 꼭 맞는 위안 같은 건 영영 찾을 수 없을 테고, 이 사실을 깨닫는 일만이 유일한 위안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스러진 모래를 그러모아 단단한 돌을 만들 순 없을까. 최지음은 불가피한 상실을 단일한 사건이나 감정 대신 지속되는 잔여와 구조로 바라본다. 간척지에 살아온 그는 바다가 땅에 남기고 간 축축한 공기와 냄새, 희부연 안개 따위를 피부 가까이 느꼈다. 보이지 않지만 몸으로 감각한 바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상실의 경험을 비추는 사유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하얗게 언 살갗 위로》는 여러 몸과 껍질을 거쳐온 사유의 흐름을 인천 구도심 지하의 작은 공간에 펼쳐 보인 전시다. 벽 한편에 걸린, 전시의 제목과 동명의 구절로 시작하는 글에는 남은 모래 알갱이를 돌처럼 공글려 손끝으로 매만진 단어들이 담담한 여백을 두고 쓰여 있었다(〈하얗게 언 살갗 위로〉(2025)). 글이 시작된 한 장의 사진—따뜻한 심해의 물이 빙하 구멍으로 솟구쳐 기체 상태로 상승하는 모습—은 반복된 상실이 하나의 원형과 빠져나감, 분리와 잔여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다시금 알게 했다. 이 구조를 보기까지, 최지음은 빙하를 찍은 우주의 위성처럼 곁에 있던 크고 작은 죽음과 상실을 멀리서 바라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의 글쓰기는 벌어진 거리로부터 사사로운 경험의 정서적 부침을 “모든 다른 곳 그 밖”의 세계로 가까이 연결한다.1
최지음, 〈하얗게 언 살갗 위로〉, 2025, 종이에 잉크젯 프린트, 29.7x21cm | 사진 양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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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부연하지 않고 사고의 잔여로 새겨진 문장은 무력한 사물의 현전에 살을 붙인다. 글쓰기의 행위 너머 부유하던 이미지는 창백한 미광 아래 주어진 면적을 작게 밝히는 물질로 놓였다. 〈고치〉(2025)는 비어 있는 내부를 겉으로 감싸 안는 형태의 얇은 조각이다. 언어를 가로질러 도착한 형상은 사물의 수동성에 파열을 일으켜 말할 수 있는 것과 볼 수 있는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때 획득된 가시성은 감각의 재배치를 통해 낡은 재현의 도식에서 벗어난다.2
무른 점토와 석고를 주무르며, 작가는 사라진 것을 붙잡으려는 남겨진 자들의 촉각적 충동에 대해 생각했다. 죽은 아이를 ‘만지고 싶다’던 어머니들의 말, 몸을 부대껴야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넋에 대해. 그런 이야기를 곱씹으며 남은 것들의 형상을 더듬었다. 상실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지만, 최지음은 무지로 인한 취약함에 머무는 대신 세상에 없는 사물을 만들어 무용한 앎에 이르기로 했다. 모르는 것들에 공존하는 틀을 유심히 살펴, 이들을 연결할 수 있는 낱낱의 고리를 주조했다. 석고와 시멘트를 뒤집어쓴 무정형의 망들은 나비가 빠져나간 고치처럼 고유한 형태의 부스러기를 바닥에 남겼다(〈통과하는 구멍〉(2025), 〈하얗게 덮어진다〉(2025), 〈껍질〉(2025)). 나는 왜인지 이 성근 조각들이 주머니에 넣어 자꾸만 만지작거리던 돌처럼 여겨졌고, 부딪혀 불을 지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공을 응시하며 “그것(곳)이 무엇(어디)인지” 모르면서도 따라가는 걸음마다의 어둠에 빛을 밝혀 줄 수만 있다면.3
최지음, 〈하얗게 덮어진다〉, 2025, 철망에 석고, 시멘트, 90x40cm | 사진 양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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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맺힌 잔여의 이미지는 조각의 몸에서 재차 납작한 표면의 몸으로 이동해 간다. 최지음은 자신이 빚어낸 미증유의 형태를 현실에서 마주하고자 카메라를 들고 경주로 향했다. 그야말로 텅 빈, 공허를 덮고 있는 주인 모를 무덤이 몇 장의 사진에 담겼다. 출력된 사진은 작가의 손에 의해 전사되어 알루미늄 판 위의 흐릿한 이미지로 옮겨졌다. 드문드문 남거나 사라진 얇은 이미지는 탈피의 과정 끝에 불완전한 풍경으로 조각나 있었다(〈빈, 덮힌〉(2025)). 이양된 흔적이 머무는 곳에서, 이미지는 원본을 충실히 재현하기보다 그 부재를 거듭 가시화한다. 사라진 것, 죽은 것, 더이상 현존하지 않음에도 우리의 시선 앞에 작동하는 먼 곳의 이미지. 부재하는 대상과의 먼 거리를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벌려 놓는 이미지. 중요한 것은 이 멀어짐이 바로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활성화된다는 사실이다. 특정한 매체-몸에 귀속되지 않고, 연이은 이동 속에서 ‘일어나는(happen)’ 이미지는 부재의 존재를 개방하며 나타나는 사건에 가깝다.4 달리 말해 최지음의 작업에서 상실이라는 사건은 이미지를 앞질러 발생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함께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이미지의 속성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애도의 형식을 닮아 있다, 고 말할 수 있을까. 애도는 상실을 메우거나 봉합하지 않고 저 먼 타자가 언제까지나 고유한 타자이자 검은 공동(空洞)으로 남아 있도록 기꺼이 실패한다. 거리를 좁히지 않음으로써 지속되는 애도, 혹은 이미지의 생은 비로소 우리 안에 남는다. “멀리 우리 안에서(Far away in us). 우리 안에, 이미지의 힘이 멀리-있음의 존재를 열어젖히는 바로 그곳, 우리 안에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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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누설된 결함 아래 일어난 이미지 곁에는 최지음의 몸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다. 글을 적어내리고, 흙을 다듬고, 셔터를 눌러 걸음과 시선이 닿았던 모든 곳으로부터 이미지를 길어 올린 몸. 외부의 이미지를 인식하는 만큼 이미지를 수행하는 몸은 발명된 매체를 초월하는 살아있는 매체로 기능한다.6 작가의 몸에 빚져 삶에 할당된 이미지는 이어질 구조 속에서 순환하며 목적 없는 흐름으로 지속될 것이다. 목적 없음은 실패가 아닌 지속의 조건이다. 허공을 휘젓다 서로를 맞잡은 두 손처럼(〈맞잡은 손〉(2025)), 투명한 창에 희끗한 얼룩을 남기는 가느다란 입김처럼, 미약한 구원의 몸짓은 이미 그것으로 충분한 순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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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음 개인전
《하얗게 언 살갗 위로》
2025.11.02 - 11.15
공소
(인천광역시 중구 용동 158-2)
후원 ㅣ 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