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의 환대를 위한 포옹
⎯   도채현ㆍ민희라ㆍ허수정 3인전
        《포옹하는 돌과 정》 서문

                 

                      부딪혀 깨어지는 것은 고착된 세계의 외연이다. 삶을 구획하는 공고한 이름, 이 생과 저 생을 구분 짓는 단단한 척도, 나와 너의 몫을 가르는 날 선 마음들. 견고함은 알 수 없는 바깥으로부터 우리의 안쪽을 방비하지만, 그 경계로 하여금 부서져 갈라진 것들을 외면한다. 정(釘)에 맞아 깎여 나간 모난 돌은 배제된 파편들을 뒤로 할 때 비로소 세계의 일부로 편입된다. 변화는 없고, 남는 것은 오직 같은 이야기의 되울림 뿐이다. 《포옹하는 돌과 정》은 반향실과도 같은 이곳에서 서로를 해하지 않고 각자의 안쪽을 가로질러 맞닿는 방식을 꾀한다. 도채현, 민희라, 허수정에게 ‘포옹’은 침투하지 않고 닿는 것에 그침으로써 바깥을 맞이하는 부드러운 움직임이다.1 이들이 만들어낸 몇 뼘의 공간에서, 주어진 범주 아래 반목하고 대립하던 것들 모두 저마다의 모습 그대로 서로를 끌어안는다. 구획되었던 이름은 소리 내어 부르는 목소리로, 굳어 있던 척도는 이곳과 저곳을 잇는 시선으로 이동해간다.

                     도채현은 언어의 범위를 앞질러 깊숙이 자리한 감각을 묵직한 표면으로 가시화한다. 스스로를 틀 지우던 유약함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반대 성질을 향한 갈망과 그 격차를 마주하는 일로부터 실현된다. 이를테면 작가는 부드러운 한지 위에 시멘트와 모래가 섞인 모르타르(mortar)를 여러 차례 쌓아 올린다. 물기가 마른 후 거칠고 단단해진 표면에는 묽은 농도의 먹 선이 그어지고, 이내 엉킨 덩굴과 자궁의 형상이 어른거린다(〈덩굴〉, 〈춤추는 자궁〉). 거꾸로, 나무를 휘어 태운 뒤 한지를 덧씌우는 작업은 다른 방향에서 시작된 두 과정 안에 서로 다른 물성이 여전히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애쓰다〉). 그을리고 쌓기를 반복하는 일련의 행위는, 하나로 섞여 들지 않은 채 나뉘어 지속되는 힘들을 온전히 품는다. 여성, 개인, 나를 나로 만들지만 도리어 가두어 버리기도 하는 속성들은 침잠하지 않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검은 부표의 모습으로 여기에 놓인다. 전복된 단단함이 다시 부드러움을 품어낼 때, 도채현은 갖춰진 자리의 안팎을 애써 넘나든다.

                     민희라는 높이 세워진 담 대신 투명한 창을 건너 세계를 인식한다. 작가에게 창은 불완전한 경계를 그 상징적 지형에 새기는 일종의 메타포이다.2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언제나 역전 가능한 관계의 형태가 놓여 있다. 어른과 아이, 언어와 비언어,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항들은 언뜻 선명히 구별할 수 있는 확고한 영역을 지닌 듯 보이지만, 민희라는 둘 사이를 공그르며 오간다. 정상성의 기준 아래 타자화된 아이의 언어는 유리에 그어진 연약한 문장들로 조각나고(〈기저선〉), 늘 다른 손에 의해 묶이던 머리칼은 캔버스에 빗어 묶은 다짐이 된다(〈실카락〉). 위치를 바꿔 매듭 지은 이야기는 가상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지만, 자각하지 못한 순간 다시 현실을 비춘다. 관측할 수 없는 세계가 눈앞의 풍경에서 반사된 빛의 형태로 드러날 때, 우리의 발 아래와 뒷모습에는 “돌봄 받는 자들이 돌보는 자들을 살리는”, 뒤집힌 장면이 새겨진다.3

                    허수정의 그림에 등장하는 ‘슴슴이’는 각자의 생에서 맞닥뜨리는 한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염원의 대상, 혹은 염원하는 마음 자체를 형상화한 캐릭터다. 무언가를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은 이미 불균형한 위치를 전제로 하지만, 작가는 우위의 전복이 아닌 내부적인 재구성의 전략을 택한다. 사슴의 머리, 사람의 몸을 지닌 슴슴이는 정체성의 재배열을 통해 돌과 정의 성질을 한 몸에 품는다. 이 복합적 존재는 여성으로 살며 겪은 불합리함, 나이로 인해 받아들여야 했던 한계, 부여된 현실의 이런저런 제약들을 유쾌하게 풀어내도록 돕는다. 나와 나를 둘러싼 최소한의 세계는 외부의 충돌 대신 작은 마음가짐의 변화로부터 회복을 도모하기에, 슴슴이는 눈물을 훔치고 주어진 현실을 한껏 껴안는다(〈회복의 잔상〉, 〈포옹〉, 〈어깨동무〉). 단정한 비단 위에 엷은 세필선으로 새겨진 슴슴이, 주변을 데우는 붉은 불꽃의 이미지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십장생도(十長生圖)처럼 길상화(吉祥畵)의 형식을 취한다(〈불멸의 사랑 노래〉). 상서로움 속에서도 여러 차이와 간극을 남겨둔 채 재배치된 화면은, 일말의 편협함마저 삶의 일부로 감싸기에 이른다.

                   전시장에 놓인 세 작가의 다정하고도 결연한 언어들은 이제 스스로 구성되는 의미를 통해 바깥으로 개방된다. 반향이 아닌 공명의 울림으로, 먼 곳에서 환대하는 몸짓은 재차 포옹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바깥은 언제까지나 영영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할 테지만, 그보다 앞서 무력해질 필요는 없다. 잠시 자리를 바꾸고, 팔을 벌려 끌어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1.“그들의 오류는 바깥을 전유할 수 있고, 바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바깥이 덧붙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 바깥은 침투하지 않는다. 바깥은 닿는 것으로 그친다. 그리고 이 닿음은 여전히 “멀리서 작용하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최의연 역, 『픽션의 가장자리』, 오월의 봄, 2024, p.70. 


2. 위의 책, p.26.

3.
민희라, 작가 노트.




《포옹하는 돌과 정》
도채현ㆍ민희라ㆍ허수정

2025. 12.6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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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거불골로 3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