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페이퍼』 제5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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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어렵게 모은 보증금으로 서울에 머물 거처를 구했다. 서울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공간이지만 내 힘으로 구한 첫번째 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2026년을 기한으로 하는 임대차계약서에 서명을 한 뒤 낯선 잠자리에 드는 첫째 날, 이 집을 떠날 날에 대해 생각했다. 여기서 언제까지 월세를 내며 지낼 수 있을까? 2년이 지난 후에도 이 집에 머물고 있을까? 아니, 2년 뒤가 오긴 할까? 따위의 소모적인 생각들. 무언가를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끝을 생각하는, 질긴 습관에서 비롯된 근심이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날 사랑이 저무는 날에 대해 생각하고, 중요한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물거품이 될 마지막을 염려하는 조급함 같은 것 말이다. 이 오래된 습관은 끝을 향한 확신이라기보다 어떤 형태로든 닥쳐올 미래의 상실을 미연의 미연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즉 나에게 주로 시작은 끝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에 지나지 않았다. 시작점에서의 끝은 어느때보다 또렷한 테두리를 지닌 거대한 벽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반대로, 정말 ‘끝’이라 이를 만한 순간에는 시작점을 돌아보며 무상함에 젖어 들곤 했다. 새로 시작하거나 시작하기로 결심한 일보다 멋대로 끝내거나 어쩔 수 없이 떠나온/떠나간 것들이 많아진 때부터 더 자주 그랬다. 지름길과 우회로의 선택지 앞에서 무엇을 고를지 고민해온 지난한 과정은 끝이라는 막다른 길 앞에 무색해졌다. 그럴 때엔 ‘어떻게든 되겠지’하며 넘어온 무심한 시간들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으며, 애초에 나에게 주어진 패는 얼마 없었고, 그래서 어느 쪽을 택하든 기어코 이곳에 도달했을 것이라는 식의 합리화로 낙심한 마음을 달랬다.
결국 내가 시작이나 끝이라 여긴 시간들은 양극점에서 서로를 겨누며 탓하고 있었다. 시작함과 동시에 끝으로 달려가는 성급하고 불안한 마음, 끝에서 맞닥뜨리는 허망함은 여하한 실체 없이도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런데 실체가 없다는 것은 이 모든 시작과 끝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에게 부여된 미시적 시간 안에서 (또는 우리 모두를 묶어 두는 거시적인 역사 안에서) 삶과 죽음 외에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만일 시간의 단면을 칼로 잘라내어 시작과 끝을 명백히 나눌 수 있는 완결된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세계는 도리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계일 테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과 이해관계만이 작용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유의미한 전환점만이 새겨진다는 의미에서, 전환점의 가장자리를 이루는 것들은 송두리째 배제된다는 의미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포기한 세계일 것이다. 어쩌면 차마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은 무엇도 시작하고 끝나지 않을, 언제나 과정 중에 있는 삶의 한복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유효한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를 마주하기로 한다. 먼 곳에서 출발한 무엇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그 너머로 지속되고 나아가는 세계, 끊임없는 전개와 생성 속에서 변화하기를 주저 않는 세계. 달리 말해 미지의 무언가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일어나는 세계. 이 세계에서는 예상치 못하게 휘말린 소용돌이 속의 이름 모를 얼굴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녹아 사라지는 잠깐의 순간들 모두 시간의 짜임 안에서 저마다의 의미를 획득한다.2 과연 그런 세계가 어디에 있느냐 묻는다면, 공들여 방랑을 허락하는 한 삶의 곳곳에 존재한다고 답할 것이다. 이어서 나에게는 그 세계가 글을 쓰는 작은 행위 안에 함축되어 있었음을, 얼마 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처럼, 대개의 경우 나는 약속된 마감일에 맞춰 글을 시작하고 끝마쳐야 했다. 겉보기에도 글은 명료한 시작과 끝을 지닌다. 시작되지 않은 글은 애당초 성립할 수 없으며, 시작된 모든 글은 끝을 맺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내게 글을 쓰는 시간과 쓰지 않는 시간의 경계는 늘 모호했다. 적어도 글쓰기란 달리기 경주를 하듯 출발선에 서서 준비 땅!을 외치고 결승선에 도착할 때 까지만 달음질을 한 뒤 멈출 수 있는 종류의 일은 아니었다. 이는 글쓰기와 나란히 지속되는 사유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을 쓰고 사유하는 동안에는 꼭 맞붙어 있던 시작과 끝이 저 멀리 늘어졌다. 아무런 위계 없이 계속되는 이 시간은 새롭게 시작되지 않고 끝으로 매듭지어지지도 않는, 늦되거나 이른 시간이었다. 거꾸로 이런 시간을 오롯이 누비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역시 글을 쓰고, 사유하는 일이었다. 그때에 나는 으레 삶의 한 가운데에 서있을 뿐이라는 감각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그 감각이 뭐냐고 묻는다면, 불과 몇 개월 전 깊이 골몰했던 두 개의 글을 설명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겠다. 올해 여름, 나는 얼마간 긴 대화를 이어온 G와 두 번의 개인전을 마친 K의 청탁을 받아 글을 썼다. 이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는 그림, 특정 장소의 과거이자 보편적 미래를 암시하는 이미지를 통해 각자의 현재를 구제하고 있었다. 나는 두 작가가 다루는 시간성에 조심스레 개입하는 글을 써보고 싶었고, 기존의 글과는 조금 다른 형식을 취했다. 먼저 G의 개인전에서는, 그가 건넸던 질문에 답하는 모양새의 글을 써 내려갔다. 짧은 한때에 열리는 전시의 시간 밖에서도 우리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님께,” 로 시작해서 “모희 드림.”으로 끝나는 편지는 보통이라면 서문이 자리했을 전시장 입구에 놓였다.3
다음으로 아직 출간되지 않은 K의 도록에는 읽는 이를 ‘당신’이라 호명하며 말문을 여는 글을 올렸다.4 이미 종료된 두 전시로 미래의 ‘당신’을 데려가 아무리 늦더라도 반복 가능한 이야기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글이 어떤 모양의 몸을 입고 ‘당신’에게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것이 전시의 수명을 조금은 연장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렇듯 각각이 부르는 대상은 조금 달랐음에도 두 글은 구체적인 독자를 상정하고 썼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했다. 무엇보다 나는 작품과 전시를 둘러싼 시간들을 앞지르거나 뒤따르며 먼 곳의 수신자로부터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거기에는 G와 K를 거쳐 나를 경유한 이야기가 마지막 마침표를 찍지 않은 채 이곳저곳으로 떠돌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어떤 면에서 글은 작업의 시공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정확한 윤곽을 그려 보이는 대신, 작업이 응축한 움직임 – 삶과 죽음을 한데 겹쳐 보는 시선과 침착하게 색연필을 긋는 손, 망설임 없이 사진을 들고 바다를 항해하여 해변으로 향하는 발걸음 – 을 정밀하게 살피며 결을 같이 하기도 했다. 이들을 정해진 틀에 부어 놓고 보기 좋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갖가지 편법은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 그보다는 이어질 여로에 합류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말과 질문을 보탰다.
요컨대 두 개의 글을 쓰며 사유해온 일련의 과정은 곧 그들과 긴밀히 조응하는 일이었다. 작가-작품-전시는 한창 진행 중인 이야기의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와중에, 무수한 질문과 답이 오가는 어느 대화의 한가운데에서 늦거나 이른 서신을 썼다. 기실 이러한 방법의 글쓰기가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질문을 진척시키고 그곳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틈입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써왔다. 불현듯 나에게 말을 걸어온 이들과 함께 사유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 나를 온통 괴로움으로 몰아 넣던 시작과 끝의 여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둘 사이를 구불구불하게 잇는 주름과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임의의 순간만을 감각할 따름이었다.
https://mohee.cargo.site/바로-저-초원이라고-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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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글을 썼던 여름이 지나고, 올해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계절에 나는 어김없이 끝내 이루지 못한 목표와 막연히 시작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뜻하지 않게 갈라진 길과 길목마다 조응할 이들이 멀리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곳에서 나는 마음껏 방랑하며 글을 쓰고 사유하는 일을 영속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얼마 전 읽은 책의 한 저자는 사유하는 사람의 모습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썼다. 둘은 한편으로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려 한다는 점에서 약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몸과 정신을 이끄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결코 수동적이지 않은 존재다.6 사유하고 사랑할 때, 나는 어느 때보다 능동적인 사람이 된다. 시작이 두렵지 않고, 끝이 시시해지지 않는다. 내가 사유하고 사랑하는 것, 그러니까 내 안에 머무는 것들은 서두르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붕붕 떠다니던 마음을 땅에 딛게 해준다. 출발선을 재고 결승선을 향해 뛰어가기 보다, 너무 느리거나 빠르지 않은 속도로 멈추지 않고 걷게 해준다. 나는 이들에게 빚진 적당한 무게의 발걸음과 마음으로 마침내 찾아온 오늘을 충실히 누리기로 한다.
추신.
제한된 지면에 쓰여진 글은 결국 끝나기 마련이다. 물론 훌륭한 문학과 영화는 마지막 장을 넘기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우리의 삶에서 지속되지만, 당연하게도 내 글은 아직 그런 힘을 지니지 못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하는 방식으로, 잠시 이야기를 그치는 방식으로 이 글의 끝을 미루고자 한다. 작별을 고하는 동시에 다음을 약속하는 말들로, 불확실한 미래의 작은 가능성을 긍정하면서. 또 만나요, 다시 만나요,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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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 제5호 발행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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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편집 ㅣ 권혁규, 허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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