𝘗𝘰𝘭𝘺𝘱𝘩𝘰𝘯𝘺

“… 서로 다른 세계를 지닌, 동등하게 유효한 의식들의 다수성”           (…a plurality of equally-valid consciousnesses,
            each with its own world)

Mikhail Bakhtin, Problems of Dostoevsky’s Poetics, ed. and trans. by Caryl Emerso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4,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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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에 관해 말해봅시다. 우리의 기원을 향해 있는 신화와 전설,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창작되는 시와 소설, 개인의 일상을 말미암아 쓰여지는 수필과 일기, 오늘, 지금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는 뉴스, 이를 둘러싼 또다른 이야기, 그로부터 파생되는 당신 자신의 이야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에는 세상을 이루는 서사의 많고 많은 종류만큼 무수한 갈래가 있습니다. 이는 내용과 형식, 그 목적에 따라 길을 달리할 테지요. 어떤 서사는 단선적인 구조 아래 일정한 체계로 구성되는 반면, 어떤 서사는 미완의 현재 속에 끊임없이 변주됩니다. 이곳의 이야기는 후자의 형식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이야기는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지만, 필연적으로 현실의 많은 부분을 누락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요. 말해진 것을 보며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는 태도를 가다듬으면서요. 시작과 끝으로 닫히는 단일 구조, 하나의 목소리로 완결에 이르는 총체적인 틀 안에서, 가장 범속한 삶에 가까운 것들은 갈 곳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만족스러운 결말을 유보한 채 세계의 불가역적인 다양성에 몸을 싣기로 합니다. 전시 《𝘗𝘰𝘭𝘺𝘱𝘩𝘰𝘯𝘺》는 특정 발화자에 의해 전개되는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각기 다른 주체가 도열하는 다성의 이야기를 펼쳐 나갑니다.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다성 소설(polyphonic novel)’ 개념에서 착안한 제목은, 작품을 그들의 이야기로 인식하는 전시의 짜임새를 아우릅니다. 개별 작품은 고유의 목소리를 지닌 음절, 단어, 문장으로, 전시라는 열린 텍스트에서 함께 응답하고 공명합니다. 결코 하나의 음성으로 소급되지 않는 – 언제나 각자의 잉여를 가지는 – 이야기는 다만 전시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결합됩니다. 바흐친의 말을 빌려 이를 일종의 ‘대화적 관계’라 칭할 수 있다면, 전시는 목적을 향한 수단이 아닌 과정 자체가 이미 목적인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1

                   사실, 말하고자 했던 바는 지금 쓰여진 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하고자 하는 것, 혹은 그와 별개로 전달되는 것은 언제나 전할 수 있는 언어를 초과하여 존재하는 법이지요. 그건 단어와 문장이 이루는 의미의 행간에, 그 바깥의 여백 어딘가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과 좀더 가깝겠지요. 이야기에 합류하고자 한다면 그곳을 응시하는 수밖에요. 전시 또한 그러한 응시를 요청합니다. 전시로부터 남게 될 반향과 가능한 관계들. 그건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과 이들이 벌려 놓은 이야기들 사이에서, 전시장에서 나서는 발걸음과 함께 유효한 의식을 획득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떠한 형태로든 예기치 못한 응답을 전제하고 있기에, 관객의 반응 또한 다성적인 구조 안에 포괄합니다. 이를 통해 지속될 작품의 생은 서로 합류하거나 분화하는 과정을 통해 보다 다층적인 의미를 생산할 것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이상하거나 예측 가능한 전개, (…) 겹겹이 쌓인 내재적 경험의 결, 휴식이나 구원이나 복수의 꿈” 속에서, 펼쳐지고 이내 사그라들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봅시다.2 전시는 이때에 영그는 정서적 부침을 부디 놓치지 않길 당부합니다.


1.이강은, 『미하일 바흐친과 폴리포니야』, 역락, 2011, p.47.  

2.
캐슬린 스튜어트, 『투명한 힘』, 신해경 역, 풍월당, 2022, p.22-23.